※ 여러 작품의 캐릭터 관계와 일부 전개가 언급됩니다.

※ 작품에 따라 ‘서브히로인’보다는 공동 히로인에 가까운 캐릭터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편의상 주인공과 이어질 가능성을 두고 팬들 사이에서 자주 의견이 갈렸던 캐릭터들을 함께 이야기합니다.

 

애니메이션을 보다 보면 가끔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분명 작품이 밀어주는 히로인이 따로 있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다른 캐릭터를 더 응원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캐릭터가 등장하면 더 반갑고, 주인공과 둘이 있는 장면이 나오면 괜히 잘됐으면 좋겠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조금 불안해집니다.

그리고 결국 이런 말을 하게 됩니다.

“아니, 저는 이쪽이었는데요.”

러브코미디를 오래 봤다면 한 번쯤 겪어봤을 상황입니다.

누가 더 예쁜가의 문제도 아닙니다.

누가 주인공에게 더 잘해줬느냐만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캐릭터는 몇 장면만으로 마음이 가고, 어떤 캐릭터는 작품 내내 노력하는 모습을 보다 보니 어느 순간 응원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위험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히로인을 응원하셨나요?


1. 렘|《Re: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

리제로에서 이 이야기를 빼기는 어렵습니다.

처음 등장했을 때의 렘은 지금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모습과 상당히 달랐습니다.

로즈월 저택에서 일하는 쌍둥이 메이드의 동생으로 등장하고, 공식 원작 소개에서도 렘은 언니 람을 깊이 존경하며 저택의 잡무를 거의 도맡는 인물로 소개됩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렘이 스바루를 바라보는 시선이 크게 달라집니다.

특히 완전히 무너진 스바루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과정에서 렘이라는 캐릭터를 좋아하게 된 사람이 정말 많았을 겁니다.

중요한 건 단순히 “렘이 스바루를 좋아했다”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스바루 본인조차 자기 자신을 싫어하고 있을 때, 렘은 그 사람이 어떤 모습을 보여왔는지를 계속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렘을 응원했던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히로인 경쟁이라기보다

‘이 정도로 서로에게 중요한 사람이 됐는데?’

라는 감정에 더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 인터넷에서 렘과 에밀리아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댓글창이 꽤 재미있어졌던 것도 괜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런 캐릭터가 서브히로인 논쟁을 가장 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에게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이야기에서 주인공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역할까지 해버린 캐릭터입니다.


2. 오노데라 코사키|《니세코이》

《니세코이》를 봤던 사람에게

“치토게냐 오노데라냐”

는 꽤 오래된 질문입니다.

오노데라 코사키는 공식 애니메이션 사이트에서도 라쿠의 같은 반 친구로 소개되는 주요 히로인입니다.

그리고 오노데라를 응원했던 사람들에게 가장 답답했던 부분은 아마 이것이었을 겁니다.

서로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타이밍이 안 맞을까요.

뭔가 말하려고 하면 일이 생기고,

분위기가 좋아지면 누군가 나타나고,

조금만 더 가면 될 것 같은데 계속 멈춥니다.

러브코미디에서 가장 사람을 답답하게 만드는 형태입니다.

특히 오노데라는 성격 자체가 적극적으로 관계를 밀어붙이는 타입이 아니다 보니 보는 사람이 대신 답답해지는 순간이 많았습니다.

“그냥 말해.”

“지금 말하면 되잖아.”

아마 화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한둘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서 오노데라를 응원하는 건 단순히 캐릭터 취향을 넘어, 몇 년 동안 고백 타이밍을 기다리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공식에서도 오노데라는 여러 히로인 가운데 한 명으로 꾸준히 상품과 별도 프로모션이 만들어질 만큼 중심적인 캐릭터였습니다.


3. 아오야마 나나미|《사쿠라장의 애완 그녀》

이쪽은 조금 다른 이유로 응원하게 됐습니다.

나나미는 엄청난 천재도 아니고, 처음부터 특별한 재능을 인정받은 사람도 아닙니다.

그냥 계속 노력합니다.

그래서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신경이 쓰입니다.

공식 상품 소개에서도 아오야마 나나미를 ‘노력파이며 많은 팬에게 공감을 얻은 인기 히로인’이라고 표현했을 정도입니다.

《사쿠라장의 애완 그녀》에는 재능이라는 주제가 굉장히 크게 들어가 있습니다.

옆에는 천재가 있고,

본인은 계속 연습하고,

잘될 것 같다가도 실패하고,

그래도 다시 시작합니다.

그래서 나나미를 좋아했던 사람 중에는

“마시로가 싫어서”

가 아니라

“나나미가 너무 현실적이라서”

응원한 사람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공식 캐스트에서도 칸다 소라타, 시이나 마시로와 함께 나나미가 주요 캐릭터로 계속 자리합니다.

천재 캐릭터에게 감탄하게 되는 작품은 많습니다.

그런데 계속 실패하면서도 다시 해보는 캐릭터를 보다 보면 감탄보다는 응원이 먼저 나옵니다.

저는 이 차이가 꽤 크다고 생각합니다.


4. 유이가하마 유이|《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

유이는 엄밀히 말하면 단순한 ‘서브히로인’으로 분류하기 조금 애매합니다.

《내청코》 자체가 하치만, 유키노시타, 유이 세 사람의 관계를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의견이 많이 갈렸습니다.

유키노시타 유키노를 좋아했던 사람과,

유이가하마 유이를 응원했던 사람이 바라본 이야기가 꽤 달랐습니다.

유이의 매력은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좋으면 좋다고 표현하고,

친해지고 싶으면 가까이 다가가고,

세 사람이 계속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단순해 보이는 마음이 갈수록 가장 어려운 소원이 됩니다.

세 사람 모두 지금의 관계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지금 상태로 영원히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청코를 다시 보면 유이는 처음 볼 때와 조금 다르게 보이기도 합니다.

분위기를 밝게 만드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누구보다 관계가 변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캐릭터는 결말을 떠나서 계속 마음에 남습니다.


5. 사실 《5등분의 신부》쯤 가면 ‘서브히로인’이라는 말부터 싸움이 납니다

그리고 이 장르의 최종 단계가 있습니다.

《5등분의 신부》입니다.

여기는 아예

“누가 메인이고 누가 서브인데?”

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치카,

니노,

미쿠,

요츠바,

이츠키.

다섯 명이 모두 히로인이고, 시청자가 누구를 좋아하느냐에 따라 작품을 보는 시선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누군가는 미쿠의 변화를 좋아했고,

누군가는 니노가 어느 순간부터 보여주는 직진을 좋아했고,

누군가는 처음부터 요츠바였고,

누군가는 이츠키를 끝까지 밀었습니다.

이쯤 되면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스포츠팀 응원에 가까워집니다.

애니메이션 한 화가 끝나면

“이번 화는 우리 쪽이 이겼다.”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런 작품이 재미있는 이유는 결국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히로인의 매력을 다른 사람이 계속 설명해준다는 데 있습니다.

나는 전혀 관심 없었던 캐릭터인데,

누군가

“아니, 이 장면을 다시 봐봐.”

라고 하면 또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6. 그런데 왜 서브히로인이 더 마음에 남을까요?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합니다.

이야기 구조상 어떤 캐릭터가 중심에 있는지 어느 정도 보이는 작품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캐릭터를 응원합니다.

아마 우리는 결과만 보고 캐릭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누가 마지막에 선택받는지는 이야기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보는 동안 마음이 가는 건 과정입니다.

고백하려다가 포기하는 모습,

주인공을 위해 아무 말 없이 물러나는 모습,

자기 마음을 알면서도 친구 관계를 지키려는 모습,

몇 번 실패해도 다시 노력하는 모습.

이런 장면을 계속 보다 보면 ‘이 캐릭터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먼저 생깁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잘되지 않을 것 같은 캐릭터일수록 더 응원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미 모든 것이 잘 풀리는 캐릭터보다,

조금씩 가능성이 사라지는 캐릭터가 더 신경 쓰입니다.

스포츠에서 약팀을 응원하게 되는 것과 조금 비슷합니다.

“아직 모릅니다.”

“한 번만 기회가 오면 됩니다.”

그러면서 끝까지 봅니다.


7. 저는 ‘누가 정답이냐’보다 왜 그 캐릭터였는지가 더 궁금합니다

히로인 이야기가 재미있으면서도 가장 피곤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캐릭터를 올리기 위해 다른 캐릭터를 깎아내리기 시작할 때입니다.

“얘는 한 게 없잖아.”

“얘를 왜 좋아함?”

“작품 제대로 본 거 맞음?”

이렇게 되면 이야기할 것이 별로 없어집니다.

사실 더 재미있는 건 반대입니다.

같은 작품을 봤는데 왜 서로 다른 캐릭터를 좋아했는지 이야기하는 겁니다.

누군가는 렘의 한 장면 때문에,

누군가는 오노데라의 답답할 정도로 조심스러운 모습 때문에,

누군가는 나나미가 계속 노력하는 모습 때문에 그 캐릭터를 선택했습니다.

같은 애니메이션을 봤는데 기억하고 있는 장면이 다릅니다.

오타쿠끼리 작품 이야기를 할 때 가장 재미있는 순간도 여기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왜 하필 그 캐릭터야?”

라고 물었는데,

상대가 자신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장면 하나를 이야기해줄 때입니다.

그러면 갑자기 그 캐릭터를 다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어느 쪽이었나요?

몇 년이 지나도 생각나는 히로인이 있습니다.

결말이 어떻게 됐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진심으로

“제발 이번에는 이쪽이었으면.”

하고 보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작품명과 캐릭터 이름만 쓰는 것보다, 그 캐릭터를 좋아하게 된 결정적인 장면까지 같이 듣는 게 더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렘,

오노데라,

나나미,

유이.

아니면 이 글에는 없는 전혀 다른 캐릭터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봤던 애니메이션 중에서 “메인 히로인보다 이 캐릭터가 더 좋았다”라고 지금도 말할 수 있는 히로인은 누구인가요?

그리고 그 캐릭터를 응원하게 된 결정적인 장면은 무엇이었나요?